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 영화 팬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불멸의 액션 스타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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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한 화려한 액션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 이소룡.
그 시절 격투 액션의 상징이자 전설이 된 이소룡, 그는 누구인가?
20세기 중반 1940년에 태어나 1973년까지 활동한 이소룡. 성별, 세대, 국적 불문 전 세계인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전설로 남아있죠. 이소룡의 인기가 절정이던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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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처럼 되고 싶어 쌍절곤을 휘두르던 영화 속 주인공, 그리고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명대사.
"이소룡이는 대학 나왔냐..?"
1970년대 남자들의 우상이었던 이소룡.
이소룡을 캐스팅한 곳이 골든 하베스트입니다. 이소룡의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은추문회였죠.
그 작품이 바로 홍콩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이소룡의 첫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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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당산대형은 태국의 얼음 공장으로 위장한 마약 제조 공장에서 일하게 된 이소룡.
공장의 정체를 알게 된 동료들이 살해당하자 사장에 맞서 싸우는 범죄 액션 영화입니다. 당산대형 제작 당시 제작비가 턱없이 부족했던 신생 영화사였던 골든 하베스트,
Q. 당산대형 촬영 중 이소룡은 제작비를 벌기 위해, 악당들에게 복수하러 가는 긴장감 넘치는 순간에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는데요.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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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시대를 앞서간 과자 PPL 이었습니다.
당산대형 제작 당시 주요 촬영지였떤 태국의 한 과자 브랜드로부터 받은 협찬입니다. 어렵게 촬영한 당산대형은 어떤 반응을 얻었을까요?
이소룡 데뷔작인 당산대형은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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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비가 약 10만 달러, 개봉 3주 만에 아시아 전역에서 약 350만 달러 수익을 기록했습니다.
최종 수익은 약 5천만 달러 이상으로 제작비의 약 500배나 벌은거죠.
골든 하베스트의 흥행 잭 팟이 터졌죠.
이후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에서 제작한 정무문, 맹룡과강까지 연달아 흥행에 성공합니다. 최고의 액션 스타에 등극하게 되는 이소룡.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세 작품 연속 흥행에 성공한 이소룡은 그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진 홍콩 영화와 위상. 인기에 힘입어 캐나다 방송사를 토코쇼에 출연한 이소룡.
1971년 피에르 베르통 쇼 이소룡의 인터뷰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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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비우십시오, 형식을 없애고, 형태를 없애야 합니다. 마치 물처럼, 물은 컵에 따르면, 물은 컵이 됩니다 .
물을 병에 따르면, 물은 병이 되지요. 물을 찻주전자에 따르면 물은 찻주전자가 됩니다. "
"물이 되십시오, 친구여,"
짧은 영상에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소룡 만의 포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소룡 무술에 열광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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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권도란??
이소룡이 창시한 무술로 자신이 배웠던 쿵후를 바탕으로 복싱과 펜싱의 스템을 차용하여 만든 종합 무술입니다.
짧은 거리에서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펀치로 제대로 구사하면 시속 50km 의 자동차와 부딪혔을 때 충격보다 큽니다.
사람들은 이소룡만의 독특한 무술과 액션 영화에 열광을 했죠. 진정한 월드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된 이소룡.
할리우드의 대형 제작사가 이소룡의 인기를인정해, 이소룡이 소속되어 있는 골든 하베스트에 합작을 제안했죠.
학잡을 제안한 영화사는 바로 워너 브라더스입니다. 이때 이소룡과 워너 브라더스 협업 작품인 영화 용쟁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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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쟁호투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대박이 됐고 제작비가 약 85만 달러였는데 미국에서 약 2500만 달러 수익을 기록, 전 세계적으로 약 9천만 달러 수익을 달성했습니다. 현재 가치로 한화 약 6천억원정도입니다.
화려했던 이소룡의 시대는 불과 2년 만에 막을 내립니다.
1973년 영화 사망유희를 찍고 있던 이소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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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트레이드마크는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오는 바로 그 작품이죠.
그런데 사망유희를 촬영하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진 뒤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1973년 고작 32살의 나이에 사망한 이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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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7월 25일 갑작스러운 영웅의 죽음에 홍콩은 슬픔에 잠겼다.
약 3만 명의 추모 인파는 홍콩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치러진 이소룡 장례식.
32세라는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소룡.
당시 이소룡의 사망 원인은 뇌부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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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은 뇌에 부종이 생긴 원인.
충격적이었던 이소룡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소룡의 사망 후 난관에 부딪히게 된 영화 사망유희의 제작. 골든 하베스트는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찾게 되는데,
Q. 영화 사망유희는 이소룡의 죽음 후, 영화의 스토리를 바꿔서 촬영을 이어갔는데요. 어떻게 바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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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에서 일부러 자신이 사망한 것처럼 조작을 한뒤 성형수술 후 얼굴을 바꾸고 범죄 조직을 추적, 스토리가 바뀌면서 성형수술 후 이소룡은 다른 대역이 촬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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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망유희는 전체 러닝 타임 103분중 고작 10분 미만.
골든 하베스트가 오디션을 통해 발굴한 한국배우 김태정을 투입, 이소룡 대신 사망유희를 완성했죠.
실제 이소룡이 찍지 못한 장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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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얼굴 사진으로 합성을 했고, 어떻게 해서든 영화 사망유희를 마무리하고자 했던 제작진.
지금보면 조악한 기술이지만 제작진의 피땀눈물이 가득한 영화네요. 이소룡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이소룡 영화의 아류작들만 쏟아내던 홍콩 영화계.
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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