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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

벌거벗은 세계사, 역사학자 권용철, 개경으로 향하는 야율융서의 목표!

by 속좁은펭귄 2024.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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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보면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이렇게 드라마를 보면서 강의를 해주니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렇게 거란은 고려에 2차 칩입을 하게되고 뒤에 적이 있지만, 수도인 개경으로와 현종을 잡으려 합니다. 

 

현종, 거란군을 피해 피난길에 오르다.

현종은 무사히 피난을 떠났을까? 현종의 피난 목적지는 나주입니다. 

 

 

현종의 피난길은 순탄치 않았죠. 현종과 함께 피난길을 떠난 병사들과 신하들이 있잖아요. 병사들은 탈영하고 신하들은 도망가고 호족들은 오지말라고하고, 현종에게 지옥 같았을 피난길. 

서경에서 빠르게 진격해 12일 만에 개경에 입성한 거란군, 

 

 

음력 1011년 1월 1일 거란군이 개경을 점령하게 됩니다. 

거란군의 목적인 현종은 이미 피난 가 버린 상황이죠. 개경까지 점령한 상태에서 회군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1. 날씨때문입니다. 거란군이 개경에 도착한 음력 1월 1일로 추위가 정점에서 물러날 때인데 얼었던 압록강이 녹으며 회군에 차질이 생기게 된 것, 날씨에 큰 영향을 받았던 거란의 행군.

 

 

음력 9월 수확한 농작물 약탈에 최적의 시기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약탈 시기때문입니다. 거란군이 예상치 못한 고려군의 항쟁. 

세번째는 유목민족의 특성때문입니다. 따뜻해지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 다음 해의 유목을 준비해야 했던 것. 거란의 행군에 영향을 준 유목민족의 한계와 흥화진의 양규. 

 

어수선한 거란군 진영에서 야율융서의 선택은?

 

 

전쟁 개시 때와 마찬가지로 철수 또한 명분이 필요하죠.

돌아갈 명분이 없던 야율융서, 이때 고려의 신하가 야율융서를 찾아옵니다. 

 

개경 점령 열흘 만에 퇴각한 거란군.

이때 그냥 돌아갈 수 없던 야율융서가 내린 명령은? 궁궐은 물론 여러 서적이 불에 타게 된 것. 고려 역사서와 문헌들이 사라지게 된 사건이 되었죠. 때문에 이 당시 역사적 기록이 매우 부실합니다. 

 

양규 장군이 회군하는 거란군을 상대로 이룬 성과는?

귀주의 김숙흥 장군과 힘을 합친 양규장군은 1700여 명의 병력으로 약 7번의 전투를 치르며 엄청난 전투 성과를 이뤄낸 것. 또한 전투에서의 승리보다 값진건 포로구출이었어요. 1700여 명의 병력으로 3만여 명의 백성을 구출합니다. 

이때 회군하는 야율융서의 본대와 맞닥뜨리게 되고 이대로 거란군을 돌려보낼 수 없던 양규는 황제의 본대를 공격합니다. 고려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1700여 명의 용맹한 고려군. 

 

 

 

나라와 백성을 아낀 양규 장군과 고려군의 숭고한 선택.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 속 숨은 영웅들입니다.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며 끝나게 된 2차 고려거란 전쟁.

 

 

거란 화제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지만, 거란에 큰 소득 없이 끝난 전쟁이 되었죠. 황제의 위상을 드러내지 못한 채, 자존심을 구긴 야율융서. 

음력 1011년 2월 23일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불에 타 쑥대밭이 된 개경을 재건하기 위해 힘씁니다. 거란에 와서 친조를 하라고하지면 현종은 병에걸려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조를 안 할 거면 강동 6주를 반환하라고 합니다. 

 

 

또 다시 고려 침공의 명분을 얻게 된 야율융서, 강동 6주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한 야율융서, 

 

 

전쟁이 끝난 지 8년 만에 3차 고려거란전쟁이 발발합니다. 

 

 

서희와 담판을 지은 소손녕의 친형인 소배암은 군용병술과 정치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거란과 송나라와의 전투에서 송나라를 고전시키며 공포의 대상이었던 소배압은 거란의 영웅입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3차 전쟁을 이르킨 거란군.

3차 거란군 병사는 10만명입니다. 소배압이 끌고 온 부대는 피실군입니다. 

 

 

소배압을 상대할 고려군의 지휘관은?

 

 

강감찬은 무과도 아니고 문과로 장원급제한 인재입니다. 2차 고려거란전쟁 이후 거란의 재침대비에 집중을 했고, 3차 고려거란전쟁을 앞두고 서경의 행정부 수장인 서경유수였습니다. 

 

 

현종은 왜 노장인 강감찬 장군을 전쟁터로 보낸걸까요?

강감찬 장군이 능력이 있으니까 보냈고 부모님의 부재와 그림움을 느꼈던 현종에게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아버지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거란군이 3차 전쟁에서 가장 먼저 점령하고자 한 곳은?

 

 

바로 흥화진으로 이를 예상한 강감찬 장군은 흥화진에 고려의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삼교천에 군사들을 매복시킨 강감찬 장군. 강감찬 장군이 준비한 파격적인 전술은?

소가죽을 이용해 둑을 만들어 거란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운 강감찬, 

 

 

소가죽을 이용해 댐처럼 강물을 막은 것, 강물을 터트려 거란군을 격파할 계획임.

강감찬 장군의 계획이 성공했을까요? 강을 건너던 거란군에게 강물이 쏟아지며 거란군 격파에 성공합니다. 

기습작전으로 거란군 격파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공격에 성공했지만, 거란군의 수가 적었던 것,  홍화진에 온 거란군이 본진이 아니었던 것!!

고려군을 혼란시키기 위한 소배압의 작전이었던 거에요. 획기적인 전술이었지만 거란군에게 허를 찔린 셈.

2차 전쟁의 실패를 본보기 삼아 빠르게 현종을 잡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길로 개경으로 향한 거란군은 비교적 완마한 해안 길로 옵니다. 

 

 

 

고려의 주력군을 따돌리기 위해 험한 산지가 있는 내륙 길을 택한 것.

개경에 빠르게 가야 하는 속도전이 된 상황이죠. 과연 어느 쪽이 더 빠르게 이동했을까?

고려군 해안 길 vs 거란군 내륙 길.

음력 1019년 1월 3일, 개경 근처인 신은현에 먼저 도착한 거란군. 

거란군에게 하루면 개경에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입니다. 거란군의 남하 소식에 궁궐 안으로 들어가 수성전을 준비합니다. 궁궐안에만 있는 현종, 왕의 지휘하에 거란군으로부터 개경을 지켜, 왕의 권위를 세우려 한 현종.

현종이 거란군에 맞서 개경을 지키기 위해 세운 작전은?

거란군을 막기 위한 고려의 비책은 바로 청야 진술입니다. 

 

 

청야 전술은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 물자와 식량들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입니다. 개경을 초토화시키는 것. 거란군뿐만 아니라 고려군도 이용 못 하잖아요?

청야 전술은 정말 급박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전술로, 그만큼 고려 사람들의 절박함이 느껴지는 전술이죠. 

 

 

고려의 청야 전술은  거란의 기병 중 타초곡기에게 특히 치명적이었는데요. 타초곡기는 무엇을 전문으로 하는 기병이었을까요?

기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든 약탈 전문 기병이 존재합니다. 보급품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점령지에서 필요한 것을 약탈합니다. 보급품이 없다면 거란군이 퇴각할 것이라 예상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 계속된 현종의 항쟁으로 지칠 대로 지친 거란군. 게다가 강감찬 장군이 후방에서 쫓아오는 상황이죠.

궁지에 몰린 소배압의 선택은?

자칫 포위될 수도 있는 윅브한 상황에 놓이자  회군하기로 결정합니다.

 

 

거란군이 퇴각하자 이를 추격해 거란군이 귀주로 이동하도록 몰아붙인 것, 고려 모든 병력을 귀주에 집결시킨 강감찬 장군, 1019년 2월 1일, 한국 역사상 3대 대첩, 그 유명한 귀주대첩!!!

 

 

3차 고려 거란 전쟁의 종지부!! 귀주대첩.

귀주에 모인 거란군과 고려군은 약 30만명, 대규모 격돌이 벌어진 전투, 그런데 성 안에서 농성전을 펼치지 않고 벌판에서 거란군과 전투를 벌인 강감찬 장군. 

 

감강찬 장군이 벌판에서 정면승부를 벌인 이유는?

거란의 연이은 침략에 고려의 군사력이 떨어졌고, 이런 상황에 거란이 또 침공할 것을 걱정한 강감찬 장군. 연이은 전쟁에 피폐해질 고려를 생각한 것. 결국 성에서 나와 한 번의 승부에 모든 것을 건 강감찬.

두 진영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죠. 서로 화살을 쏘며 시작된 전투.

 

 

각각 북쪽엔 거란군이 남쪽엔 고려군이 진영을 갖춘 상황이죠. 전투 초반엔 거란군 진영인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화살을 멀리 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에 놓인 거란군. 반대로 화살이 바람과 부딪치며 불리한 상황에 처한 고려군.

 

 

 

바뀐 바람의 방향으로 인해 순식간에 뒤바뀐 전세,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던 때, 고려의 정예군 1만여 명이 합류합니다. 검차+기병+보병 조합으로 거란군을 둘러싸고 공격합니다. 사방에서 거침없이 거란군을 공격한 고려군!!

이에 거란군의 전열이 무너지며 군사들이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살기 위해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도망간 거란군.

 

 

최정예 10만여 명의 군대 중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 명에 불과합니다. 

 

 

동아시아 최강대국 거란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머쥔 고려, 거란 역사상 처음으로 겪은 참혹한 패배였습니다. 

1차 서희의 담판, 2차 소득없는 거란의 회군, 3차 귀주대첩에서 패배. 

 

1019년 고려의 승리로 끝이 난 26년간의 고려거란전쟁!! 26년간 이어진 세 차례의 전쟁을 실패로 끝낸 거란의 운명은?!

1031년 야율융서 사망 이후 황족들이 내분에 휩싸이고 권력자들은 백성들을 수탈하는 데만 급급하다 보니 각지에서 대규모 반란 발생으로 혼란해진 거란.

거란이 몰락의 길에 들어섰을 때, 거란에 불만이 극심했던 여진족이 이후 금나라를 세워 송나라와 손을 잡고, 1125년 멸망을 맞이한 거란.

유목민에서 시작해 제국을 건설하고 멸망했던 거란. 제국의 흥망성쇠를 보는 우리에게도 교훈이 되길 바라며..

 

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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