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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

책을읽어드립니다. 징비록편

by 속좁은펭귄 2019.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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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요약해서 설민석 선생님이 설명해주는데 너무 재밌음... 설명이 재밌음...ㅎㅎ


책도 이리 재밌으면 좋겠음.!!



징은 예전의 잘못을 다스려 비는 뒤에 닥칠 우환을 경계하다.


권력의 최측근 임진왜란 당시 조정의 중심. 서애 류성룡의 거침없는 기록.



학창시절 배웠지만 그땐 몰랐던 통한의 기록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반면 교사의 메시지.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아 엄선한 오늘의 책은?



국세정세에 대한 무지와 당파 간 갈등심화

임진왜란 당시 속수무책으로 당한 조선.


당시 혼돈의 조선, 참혹한 전란의 결과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2019년 다시 읽는 임진왜란사



과오를 징계하며... 징

삼가할 것을...비

기록하다...록


왕의 최측근이자 성웅 이순신을 추천한 임진왜란의 중심에서 모든 정보를 보고 받으며

전시 상황을 꿰뚫고 있던 인물인 류성룡.


다시는 비극이 없길 바라며 쓴 생생한 7년의 전란사. 그게 징비록입니다.


류성룡 선생이 매우 많은 직함을 보유하셨던데?



류성룡의 이력은 21세 퇴계 이왕 선생 제자로 입문해 25세 문과 시험에 급제해 외교부 제1차관실 의전장.



영의정을 끝으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한사람이 수많은 직책을 겸직하는 것이 가능했는지?


삼권분립이 없던 조선시대는 학문적 성과와 덕망을 기준으로 겸직이 가능했던 시기임.


태조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다면 세종대왕에게 황희가 있었죠. 선조에게는 류성룡이 있었음


류성룡이 있어 조선이 아직 망할 운명은 아니었구나.. 싶다고



아이러니한 것이 징비록이라는 책 자체가 징계하고 대비하라 변해야 한다고 쓴 책이잖아요.


정작 우리나라에선 읽혀지지 않고 조선정비록으로 바뀌어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름.

대한민국에서는 잊힌책으로 불리기도 한다고해요..ㅠㅠ



R2D2D의 전지적 관찰로봇이 류성룡 같다고함.


스타워즈와 징비록과 닮은점은?? 양편으로 나뉜채 격돌하는 고전적 전투방식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가 상상할수 없는 순간들이 오게되는데



심지어 적을 죽이는 것이 최고의 선이 되는 상황이 됨.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는 모든 글 가운데서 피로 쓴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피와 잠언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그저 읽히기를 바라지 않고 암송되기를 바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오옹...ㅎㅎ저책도 읽어봐야겠어용.


징비록이야말로 류성룡 선생이 피를 토하면서 쓴책인거 같다는 김상욱.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써내려간 류성룡의 임진왜란.



중국 고대 병법서인 손자병법의 격언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가 힘없이 패배한 이유는?  적국인 조선을 우리를 일본인들은 알았다고.


반면 일본에 대해 잘알지 못했던 조선.


왜 우리는 일본을 지피하지 못했을까??



징비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임진왜란전 한 중일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당시 중국은 명나라 말기 신종(만력제)의 집권시기임.


조선은 선조재위기간이었고 동인과 서인 붕당 정치가 본격 대두한 시기임.


눈앞의 당리당략에만 치우쳐 어지러웠던 국내상황. 또한 국제 정세 파악에도 소홀했음.


비교를 위한 조선왕조 500년 그래프.



그렇다면 그래프의 정점을 이룬 시기의 왕은?


15세기 세종대왕 시절 전성기를 누렸던 조선. 이때는 일본에 대한 정보수집도 많이 했어요.


징비록 제일 첫장에 나오는 신숙주 이야기.



세종 25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신숙주.


성종 2년에 해동제국기를 편찬함



그래프 최하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대



문제는 15세기초 태조에서 성종까지 조선 초기 일본 사절 파견 횟수가 60회였어요.


그러나 16세기 연산군부터 선조까지 일본 사절 파견 횟수 단 5회임.


그러니 몰라도 너무 몰랐죠.


아무리 상황이 다르다해도 너무 큰 차이죠. 과연 왜 그랬을까??


200년간 지속된 평화 때문이에요.



흔한 명절 안부인사가 큰일없이 무탈해라~잖아요. 이건 덕담이 아니라 악담임.


잦은 고통이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요! 그렇기에 인생의 위기를 고통으로만 여기지 않고 나를 강하게 만드는 기회라고 생각해야해요.


그것이 바로 징비록을 통해 전하고픈 메시지에요.


문제는 조선을 너무 잘 알았던 일본.



그후 조선을 발판 삼아 명나라까지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움.


때문에 끊임없이 조선의 정세를 살피는데 승려, 상인 등을 가장해 정탐을 함.


그결과 듣고도 믿기 힘든 보고 내용



두번째는 절반이 노비입니다.


일본이 보기에도 심각했던 양반들의 수탈.



보고를 듣고 군사를 모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수가 30만명


그리고 모든 위기는 시그널이 있어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내온 서신이 바로 그것!





당시 조선과 일본은 대마도를 통해 소통을 했는데


서신을 보고 깜짝놀란 대마도 도주가 무역량이 많은 조선과의 관계가 중요했던 상황이라


임의로 서신 내용을 완곡하게 수정을 함. 입조를 통신사 파견으로 바꾸고 정명향도를 가도입명으로 바꿈.


가도입명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본 류성룡은 완곡한 표현 속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류성룡의 간청으로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합니다. 마침내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이 일본으로 그런데 문제는 안 만나줘요.


심지어 7개월동안 결국 긴 기다림 끝에 만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연회자리에 어린 아들을 안고 등장함.






서둘러 조선으로 돌아온 황윤길과 김성일은 선조에게 보고를 하는데




그런데



저들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올 일은 없다고하는 김성일.


두사람의 상반된 주장. 이를 이상히 여긴 류성룡은 같은 동인인 김성일을 찾아가 물었는데


" 그대의 말이 황윤길의 말과 다르니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어찌할 것이오?"


" 왜인들이 끝내 움직이지 않는다고 제가 어떻게 장담할수 있겠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은 너무 지나쳐서 안팎의 사람들을 놀라게하고 미혹시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려고 하였을뿐입니다. - 류성룡의 징비록중.


결과적으로는 큰 실수를 했지만. 동일 김성일의 말도 일리가 있는게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선 많은 예산이 필요해요.


세금을 더 걷었다가 민란이라도 일어날 기세! 전체적으로 위태로웠던 조선의 상황.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바쳐 싸웠던 김성일. 하지만 전쟁 시그널을 외면한 조선.






결국 아무런 대비를 못한 채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부산진, 다대포, 동래성 차례로 격파한 왜군은 그 후 충주 탄금대에서 벌어진 전투.

조선의 주력군대가 탄금대에 결집한 상황임.


결과는 참패! 그럴수밖에 없었던 것이 병조의 군사 선발 목록을 받아 군사를 소집해보니 선비들이 왔는데 붓을 들고옴.



유생들은 관복을 갖추고 시권을 들고 서리들은 평정건을 쓰고 와서는



완전 오합지졸이죠.

준비되지 않은 병력때문에 패배함. 덕분에 왜군은 힘들이지 않고 한양까지 북진함.


1592년 4월 13일 부산포 습격을 시작으로 3월 3일 한양 점령까지 20일.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왜군.





전세의 전환. (조선의 비밀병기)



일본이 7년을 정탐했지만 끝까지 얻디못한 세가지 숨겨진 데이터가 존재함.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꾼 세가지?!


왜군의 경로를 보면 곡창 지대인 전라도로 갔을 것. 그러나 곧바로 한양으로 간 이유는? 선조를 인질로 잡으면 조선은 게임끝이에요.



속전속결로 명나라를 공격하려 했던 일본은 그런기대로 한양에 왔떠니 선조는 평양으로 감.


뒤를 쫓아 평양에 도착했더니 선조는 의주에 가있음.


선조의 발빠른 몽진에 전의를 상실한 왜군?


일본의 전술이 보통 성주들은 성을 버리지 않아요. 차라리 싸우다 죽거나 자결하거나 항복하거나

왕의 몽진은 일본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장면임.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꾼 첫번째는 선조의 몽진이에요.







임금은 한양을 떠났어도 조선이 망할 운명이 아니었던 게 임진왜란 직전 류성룡의 신의 한수!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꾼 두번째는 류성룡이 천거한 이순신이에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게 보급인데 1차 진격부대에 보급품을 전달해야했던 왜군은 수로를 통해 전달하려 했는데


쌀천섬을 부산에서 한양으로 이동시킬때 육로로하면 말 500필이 필요하지만 수로는 배 한척이면 가능함.


2차 부대는 당연히 수로로갈 생각을 했죠.


그러나


우리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해상 보급로를 차단.



적군의 생명줄을 끊어버린 이순신과 수군의 활약.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꾼 세번째는 의병이에요.


조선시대 최하위 신분은 노비와 승려에요. 그 힘없던 보이던 사람들이 낫을 들고 곡갱이를 들고 지형지물을 활용해 게릴라 전투를 벌이며

육로의 보급로를 차단함.




왜군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


그리고 명나라 연합군까지 합세를 합니다.


1592년 4월 봄에 시작한 전쟁이 7개월후 겨울까지 이어짐.


따뜻한 남쪽에서 생활하던 왜군은 처음 경험해본 평양의 혹독한 추위로



여세를 타고 점차 전선을 회복한 조. 명 연합군.


그런데 기세를 타고 남하하다가 경기고양 벽제관에서 왜군에 대패하게 됩니다. 끝없는 대치상황에

많은 병력을 잃은 왜군.


결국 진격을 포기하고 휴전 협정에 돌입함.

이때 공격했으면 전쟁이 끝나는 거거든요.






강화협상과 정유재란.


일본의 요구가 중국 황제의 딸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첩으로 보내라!


결국 강화 협상 결렬 후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게됨. 하필 이때 이순신은 옥살이중인거에요.


당시 왜군의 선봉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계략이 자신의 라이벌인 가토 기요마사를 해치우기 위해 일부러 기토 기요마사가 부산에 상륙한다는 정보를 흘림.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이순신에게 명을 내리는데 적의 정보라 100% 믿을수 없고


부산쪽은 물길이 세다보니 노를 젓는 격군들이 쉬이 지치며 격군을 위해 물을 길을 만한 섬도 몇개 없음.


이유를 들며 출정에 뜸을 들인 이순신. 이에 화가 난 선조는 게다가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느 반대 세력의 견제.

결국 이순신에게 사형선고를 하게됩니다.


정말 돌아가실뻔했어요..ㅠㅠ




졸병신분으로 권율의 아래에서 백의종군을 하게됨.


몸에난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크지 않았을까....


나라를 위해 목숨바쳐 싸웠는데 돌아오느건 이런 고문이라니..




그리고 같은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셋째아들마저 왜군에게 잃음.


1597년은 이순신 개인에게 최악의 해에요.



1597년 7월 15일 벌어진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한 조선 수군.





돌아온 이순신에게 남아있는 것은 12척의 배뿐임.


명량해전의 기회가 된 12척의 배.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전장에 복귀한 이순신.



적이 패하여 달아났고 우리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 류성룡의 징비록중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합니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났으니 너나할것없이 모두 철수를 서두르는 상황임. 끝까지 싸우길 원한 한 사람!! 바로 이순신이에요.


쳐들어온 적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들이 다시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요.


이대로 돌려보낸다면 왜군은 분명히 다시 침략해 올 것. 절대 그냥 돌려보낼수 없다!!




연합군의 작전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명나라 장수 진린.



그러나 진린의 마음을 훔친 이순신?!


왜군의 배가 섬 근처까지 침범해오자 이순신이 군대를 보내 무찌르고


왜군의 머리 40개를 베어 모두 진린에게 주며 그의 공으로 돌렸다.


진린은 기대이상의 대우에 기뻐하였다.- 류성룡의 징비록 중.


또한 명나라군의 횡포를 근절시킨 이순신.



이순신이 찾아와 눈물로 호소하자 공격을 허락한 진린.


그것이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에요.



이순신의 죽음으로 끝나게된 임진왜란.





전쟁 발발 직후 우왕좌왕했던 조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린 징비록.


특히 전란 이전부터 혼란했던 조선의 내부.


1591년 전란 1년 전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 일행이 돌아왔다.


황윤길은 반드시 전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김성일의 대답은 달랐다.




두사람의 상반된 보고로부터 모든것이 시작되었다.



조정에 혼란을 야기한 두 사람의 상반된 보고.


상반된 보고였으나 전쟁이 날 것이란 의견이 있었던 상황임. 



왜군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 준비가 미흡했던 것이 큰 실책인거 같다고.


전쟁준비를 아예 안한건 아니에요.

관리들과 백성들의 반발에 부딪혔던 상황임.







요즘도 예비군 훈련가면 원성이 가득하다고함.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인데 왜 예비군은 불평을 하나?


당시 백성들은 왜 불만을 늘어놓았나?



20,30대들의 SNs에서 벌어진 일.






당시 상황을 위기로 여기느냐 여기지 않느냐의 차이임.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요.


조선조정은 분열이 심했던 임진왜란 초기라








조선은 전형적인 문관 위주의 사회에요.

위기가 없이 오랜 기간을 지내다보니 무관의 영역을 문관이 장악한 경우가 대다수임.


전문가가 가도 시원찮을 상황인데 





물론 책임을 선조가 져야한다고 봐요.

그런데 선조 한사람의 책임으로 돌리수 있을까??


선조가 몽진하지 않고 한양을 지켯다면 결과가 나았을까? 그래서 잡혔다면 조선은 끝이죠.



백가지 가운데 한가지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적에게 패하고 만 것이다.

-류성룡의 징비록 중.





전쟁의 시작과 과정, 대처 등 거시적 관점에서의 비난을 받은 것.


이건 명나라의 은혜다?!


나라를 위해 싸운 의병들보다 몽진을 도운 신하를 치하한 선조.


무장 이성계의 왕조 교체로 건국된 조선.


이후에도 반정으로 왕이 바뀌기도 했던 조선.



전술적으로는 선조의 몽진에 동의를 함. 전술이라기보다는 도망이죠.


부산에서 한양까지 약 20일 만에 도착한 왜군.


막힘없이 엄청난 속도로 올라온 셈임.








백성들은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몽진을 떠나는 왕을 보며 극심한 공포를 느꼈을 백성들.






왜군은 무조건 많이 죽이는 것이 목표잖아요.

공을 증명하기위해 사람의 귀와 코를 베어간 왜군




귀 이 + 코 비 + 아비 야


임진왜란때 코와 귀를 베어간 왜군 때문에 생긴 말이에요.


산사람의 코마저 베어간 왜군. 결국 힘없는 여성들과 아이들의 희생양이 됐죠.


굶주림에 인육까지 먹었던 처참한 상황임.


"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잇었다."




어떤 사람들은 산 사람을 도살하여 내장과 골수를 먹고 있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27년


" 옛날에 이르반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한 것도 이처럼 심하지는 않을것이니 너무나도 참혹합니다.- 선조실록 27년


명나라 군인 하나가 잔뜩 술을 먹고 가다가 길에 구토하는 것을 보았는데 천백의 굶주린 백성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머리를 땅에 박고 핥아 먹었다. 그마저도 힘이 미치지 못한 사람들은 밀려나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난중잡록.


적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믿었던 왕에게 버림받은 채 처참했던 백성들의 삶.



하지만 나라의 위기에 죽음을 불사한 의병들.



의병!!


낫과 곡괭이를 들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초들의 힘.




홍의 장군 곽재우는 이벤트의 달인이다?!


동에 번쩍 서에번쩍 나타나며 왜군들을 혼란스럽게 만든 병법.


마치 도깨비나 신선과 같아보였던 곽재우 장군.


음공이라고해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이용한 공격술도 사용했음.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다가 짜증을 유발하는 기분 나쁜 소리로 돌변함.


소리를 이용해 적을 동요시킨 심리전의 대가.



문과 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을 해요. 선조를 비판하는 답안지를 제출한 곽재우.


결국 그에게 돌아온건 선조의 합격 취소.


오히려 전 재산을 팔아 나라를 위해 선봉에 선 곽재우.


잊지않고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의병



어머니 상중에도 나라를 위해 싸운 김덕령 장군.


왜군들은 김덕령 장군을  불사신으로 알았어요. 맨손으로 호랑이를 두 마리 때려잡아서..


김덕령. 그를 부르는 말은 비장이었음. 날아다니는 장수.


전쟁을 나서다 토벌 소식을 듣고 돌아오는 의병에게 돌아오는건 잔인하고도 뼈아픈 의심의 화살.


끝내 선조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김덕령.


곽재우도 몇번이고 감옥에 갔다가 죽겠다 싶어서 나와서 산속으로 들어가는데.. 당시 의병 기록에 의하면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당시 상황.


징비록에는 승전보를 울린 의병만 기록이 되어있어요.


아마도 다수의 의병들은 이름없이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무모하게 짝이 없는 공격을 했을 것 같다고


꿋꿋하게 이어온 민초들의 거센 반란.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처절한 몸부림.


승부와 관계없이 끝까지 맞서 싸운 의병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이전의 모든 역사 서술은 굉장히 귀족 남성의 서사잖아요.



노약자, 어린이, 여성은 전쟁 속 취약집단이죠. 사회적 약자들이 가장 고통을 많이 받아요.



과연 여성들은 한일이 없었을까? 여성의 활약에 대한 기록이 없어요.




기록되지 못한채 잊혀진 여성들의 이야기.

나라를 위해 싸운 여성 의병들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없었던 것이 아니라 기록되지 못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하지만 분명히 있었죠.




3.1운동하면 유관순 열사가 떠오르고 김구선생님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부터 시작해서 자료가 있고 얼마 안됏으니까..


기록되지 않은 여성 의병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입니다...!


그토록 참담했던 현실..




전쟁의 판을 뒤집어 놓은 영웅!



임진왜란의 터닝포인트는 이순신의 등장이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순신의 위대함.


뜻밖의 기록에서 발견한 이순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담은 일본의 대하소설에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총사령관이었죠.


버나드로 몽고메리의 저서 전쟁의 역사에서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고



제2차 세계대전의 명장도 인정한 이순신의 업적.


특히 적의 보급로를 차단한 것을 높이 평가함.


자그마치 왜군의 수는 15만명인데 어디서 잘지 뭘 먹을지는 가장 중요한 일이죠.


전쟁의 판도를 뒤집을수 있는 보급로의 차단.



가장 중요한 보급품은 무기에요.

보급로 차단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왜군의 무기 공급을 차단했다는 것.!


현대전을 통틀어도 높이 평가되는 이순신의 전술전략.





" 바라건대 진관 제도를 다시 정비해  평시에는 훈련에 전념하고 전시에는 한곳에 집결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류성룡의 징비록중.



진관제도는 지역단위 방어체제에요.


지방자치단체장이 유사시에 그지역의 사령관이 돼요.


각 지역이 독자적으로 적을 방어하는 진관 제도.


왜군 입장에서는 산 넘어 산이죠. 도성에 당도하는 시간을 벌수 있는 전술인데



대규모 공격에는 취약한 진관제도.


을묘왜변은 1555년 전라남도, 강진 진도일대에 왜구가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한 사건임.


을묘왜변이후 제승방략 체제로 전환을 합니다.




대규모 공격에 용이한 제승방략체제.


제승방략 체제는 대규모 군사 훈련이 필수에요. 진관 제도의 부활을 주장한 류성룡.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방어선인 충주 탄금대.

한양을 지킬 최후의 보루.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조선군.


이곳에 있던 조선의 관군은 전멸하였다.




조총이 중요한건 사실이에요.






조선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조총의 위력.

천둥같은 조총 소리에 혼비백산하기도함. 초기에는 신무기에 대한 심리적 효과가 컸을거라고


하지만 발사하려면 굉장히 힘이들음. 요즘 총과 달라서 총구를 잘 닦아줘야하고 이게 제대로 안되면 폭발할수 있어요.


화약넣고 다져서 총알을 넣고 방아쇠에 불이 연결되어 있어서 심지에 불을 붙이고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림.


한번쏘고나면 리셋해야함.


굉장히 숙련된 병사가 30초  총을 쏜후 장전하는 시간동안 다음 전열이 빠르게 앞으로 이동을 함.


시간적 단점에도 위협적이었던 일본 조총 부대.




신기전이라고해서 화살대에 달린 화약이 타면서 로켓처럼 화살이 날아가는 로켓추진 화살이었어요.




비격진천뢰는 시한폭탄처럼 발화장치가 있어 폭발 시간을 조절할수 있는 포탄이에요.

이른바 귀신폭탄이라고함.


왜군이 가장 무서워했던 조선의 무기가 비격진천뢰에요.



승자총통은 조총과는 작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요.


언제 발사될지 모르는게 포인트임.




역사상 큰 변화를 이끌어온건 아주 작은 기술적 차이에요.

조총만큼의 위력은 없었다고해요.


항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및 명에 투항한 왜군을 말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항왜인이 김충선이에요.




선조가 이름을 지어준거에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넘어온 항왜인들. 그들의 기록은 난중일기와 영화 명량에도 등장해요.




정찰병 역할도 수행하며 큰 힘이 된 항왜인들.


급변했던 동아시아 정세. 7년의 전란 조선은 과연 징비하였는가?




명은 아예 망해버리고  근데 우리만 안 바뀌었어요.


교훈을 얻지 못한거에요. 징비록도 썼지만 많이 읽지도 않았고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실학이 사실은 정권을 잡지 못한

재야의 운동이었거든요. 



무엇보다 중요한건 마음가짐이죠.


눈앞에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는 없어도 



지금의 우리는... 과연 나라면... 그때 그사람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현재의 모습과 비춰 생각해 볼만한 책이라고함.







하..... 설명만 들었는데 많은 생각이 들게하는 책이네요....ㅠㅠ


당장 눈앞에만 있는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는데...다시한번 또 어떻게 살아야할지..ㅠㅠ 심히 고민되고...어떻게 방향을 설정해 살아야하는지.. 복잡하고 혼란한 마음이 듭니다....

그시대때의 일들을 듣고나면 가슴도 참 아프고 또 그렇게 지켜주신 분들에 한없이 감사하면서 이런 자유와 편안함을 느끼고 있음에 또한번 감사의 마음이 들고 숙연해집니다...



<출처: tvN 책읽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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