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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

벌거벗은 세계사, 박삼헌교수와 떠나는 세계사 여행, 일본, 외식 문화를 발달시킨 추억의 경양식.

by 속좁은펭귄 2024.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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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이후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서양 요리, 이때 확산된 새로운 외식 문화가 경양식입니다. 

그때 그 시절 우리의 추억 속 음식인 경양식. 돈가스와 밥, 수프까지 함께 즐기는 외식 메뉴죠. 양식인 줄 알았는데 일본식이었던 거네요?

 

풀코스의 정통 양식과 달리 몇 가지 음식이 변형된 것. 1900년 전후로 빠르게 증가한 도쿄 경양식 식당이 그 수만 1500곳 이상됐어요. 지금까지 어이진 인기로 국민 음식이 된 돈가스.

 

돼지고기를 활용한 또 다른 양식은 고로케입니다. 

 

 

고로케는 작고 바삭바삭한 소리가 나는 것 이라는 뜻의 프랑스 크로켓트 croquette에서 유래된 음식입니다. 자투리 돼지고기를 활용해 일본 가정식으로 자리매김했죠. 전쟁으로 인해 돼지고기가 주목받은 것처럼 새롭게 떠오른 일본군의 식량 문제.

18세기까지 일본군의 전투식량은 주먹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동 중 상하기 쉽고 밥 지을 때 나는 연기가 문제였죠. 군사 식량으로 주먹밥 대신 주목받은 서양음식은?

 

 

밥대신 빵!!

밥이 주식인 일본인에게 생소했던 서양의 빵, 더군다나 딱딱한 서양 빵에 익숙해지기 어려웠던 일본인, 그래서 일본 입맛에 맞게 새롭게 변형된 서양의 빵이 있습니다. 바로 닽팥빵입니다. 

 

서양의 빵은 어떻게 단팥빵이 됐을까?

단팥빵의 창시자는?

 

 

키무라 야스베에, 일본 단팥빵의 창시자로 하급 무사 사무라이 출신으로 1869년 도쿄에 빵집을 개업합니다. 

당시 제빵 관련 정보가 부족해 난항을 겪은 키무라는 빵을 부풀게 하는 이스트를 구하기 어렵고 입맛에도 맞지 않았던 것. 고민하던 키무라에게 떠오른 아이디어. 

" 익숙한 중국의 찐빵을 서양처럼 구워 보면 어떨까?" 서양의 빵 속에 넣은 익숙한 일본식 단팥 소. 

 

 

이스트대신 술누룩을 사용해 발효하고 술누룩을 쓰면? 효모보다 약한 발효력을 보완하기 위해 발효 시간과 설탕을 늘려 부드러운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단팥빵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은?

키무라의 빵집에서 하루 판매량이 약 15000개에 달한 단팥빵, 이후 도쿄 긴자의 명물로 자리 잡은 키무라의 빵집. 

 

 

오랜 역사를 알 수 있는 메이지 시대의 키무0야 광고. 빵덕후들에겐 성지순례 코스이기도 해요. 150여 개에 달하는 종류의 빵들 중에 간판 메뉴는 단팥빵!! 달콤한 팥과 겉바속촉 빵의 완벽한 조화라고 하네요. 점포 2층에 위치한 빵 공장, 이곳만의 비법으로 손수  단팥빵을 만들고 있다고. 핵심 재료인 단팥을 가득 채운 뒤, 오븐에 넣고 8분간 구워주면, 전통을 자랑하는 긴자의 명물 단팥빵 완성!

딱딱한 바게트처럼 기존 빵들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고 일본인들을 빵에 매료시킨 단팥빵, 일본인들이 빵을 먹는 것에 적응하자, 빵을 군사식량으로 보급한 일본 정부. 그리고 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빵이 있습니다. 

 

 

1877년 세이난 전쟁의 향방을 뒤바꾼 단팥빵!

세이난 전쟁은 메이지 유신으로 몰락한  무사 계급이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일어난 일본 최후의 내전입니다. 잦은 폭우로 밥을 짓기 어려웠던 전황, 주먹밥을 먹지 못해 빈속으로 싸움에 나선 사무라이들, 단팥빵을 보급받은 관군의 상황은?

 

 

단팥빵을 포함한 약 142톤의 빵을 주문한 관군들, 주먹밥 대신 빵으로 식사를 챙길 수 있었던 관군들. 단팥빵의 힘으로 관군들의 승리로 끝이 난 세이난 전쟁.

사무라이가 만든 빵이 사무라이 시대를 끝낸 아이러니. 세이난 전쟁 이후 휴대성을 인정받아 전투식량으로 자리매김한 단팥빵. 

 

 

장기 보관을 위해 수분이 전혀 없도록 굽는 건빵, 다른 이름은 건면포( 마른 빵) 입니다. 

 

 

신용카드 크기 정도였던 건빵, 서구화의 바람이 최고조에 달한 1880년대에는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던 단팥빵.

1910년대 하루 평균 판매량이 약 10만 개라고 하네요. 

 

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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